서명 : 싸우는 사서와 사랑하는 폭탄
지은이 : 야마가타 이시오 저, 마에시마 시게키 그림, 김용빈 역
출판사 : 학산문화사(eXtreme Novel)
평점 : ★★★★★ (5.0)
작품을 읽으면서 마음 속에 떠오른 시가 하나 있습니다. 그 유명한 故천상병 시인의 '귀천' 이지요. 비록 하늘은 아니지만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한 점 부끄러움도 없기를 바랬었고, 그렇기에 누구보다도 아름다웠던 두 사람의 이야기.
그 정도로 감동적인, 좋은 이야기였어요.
이 작품의 전개방식은 상당히 옛 된 수법을 쓰고 있습니다. 흔히 보이는 독자의 눈을 붙잡아 두기 위한 특정 기호의 난립은 찾아보기가 힘들어요. 주인공에게 엉겨 붙는 인간으로서의 리얼리티를 상실한 기호로서의 캐릭터라던가, 독자의 눈을 붙잡아 두기 위한 전개에 불필요한 사건의 발생 등은 사실상 없다시피 합니다. 잔재주를 부리지 않고 작품 자체의 이야기만으로 묵묵히 승부한다고 할까요? 매력적인 등장인물은 넘쳐나지만, 그러한 등장인물들의 매력은 인위적인 캐릭터 조형, 속칭 모에가 아니라 신념을 가진 행동으로서 표현됩니다. 요즘에는 찾기 힘든 기분 좋은
우직함이 이 작품에는 있어요.
아무리 잔가지가 뛰어나도, 역시 중요한 것은 줄기니까요.
하지만 이러한 서술방식은 책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이 매력적으로 느끼기에는 힘듭니다. 앞서 말한 특정 기호의 난립은 사실 책에 익숙지 못한 청소년층의 눈을 현혹시키기 위한 기교로서 성립된 것이니까요. 무의미한 것이 아니에요. 그렇기에 첫 장부터 느껴지는 음울함은, 밝고 가벼운 즐거움이 대세인 현재의 라노베 시장에서는 이질적입니다. 이러한 음울함을 만화적으로 과장시켜 초반 임팩트를 주는 작품도 많습니다만, 이 작품은 그런 것도 없어요. 오염된 공기로 매캐한 광산촌,
고담대구같은 분지 지형이라 환기가 안 되는 덕에 햇빛마저 본래의 색을 잃는 어두운 도시. 초장부터 폭탄으로서 인간성을 거세당하는 주인공. 빛이 보이지 않는 미래. 이런 배경들을 그저 담담하게 쌓아올릴 뿐입니다.
밝고 건전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분에게는 많이 부담스러운 작품이랄까요. 하지만 저는 이런 우울한 이야기 쪽이 원체 취향이기도 하고, '팟' 하고 터지는 매력은 없지만 차근차근 전개에 무게를 더해 나가는 것에 갈수록 기대감이 커져 갔답니다. 개인적으로 이렇게 성실하게 준비를 한 소설 중에서, 제 가슴을 울리지 못한 소설은 없었으니까요. 무엇보다 책 좀 읽은 사람이라면 고작 그 정도로 지루하다고 느끼기는 힘들다고 생각해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에 비교한다면 이 정도야 술술 넘어가는 거잖아요. 제 인생에 한 번에 못 읽은 유일한 소설이 율리시스입니다. 그 책으로는 사람이 아니라 곰도 잡을 수 있을 거 같다능 -_-
이야기가 살짝 샜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제 기대는 보답 받았습니다.
잔재주를 일채 배제하고는
차근차근 쌓아 올린 무게로 클라이맥스에서 독자를 압살시켜버리는 이런 전개, 정말 오랫만이였어요. 개인적으로는 마술사 오펜이 바로 떠오르더군요. 근래 읽은 작품들은 가볍고 라이트한 재미나 우울한 아픔만이 있을 뿐 특별히 감동이 있는 스타일이 없었거든요. '부엉이와 밤의 왕'이나 '토라도라 5권'은 감동적 이였지만 '어둠'을 포옹한 감동은 아니고요.
어둠이 거세된 인조의 빛은 싫습니다. 결국은 유리정원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드니까요.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질척하니 어두운, 희망이 없는 세계에서 태어나는 빛이야 말로 진솔함이 느껴지는 법입니다. 후쿠모토 노부유키의 작품들(도박묵시록 카이지, 은과 금 등등)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중에서도 은과 금은 특별히 좋아하는 작품이에요. 금으로 상징되는 주인공은 은으로 상징되는 긴지씨에게서 어둠의 일을 배워나가며 대단한 재능을 발휘했지만, 결코 어둠에 굴복하지 않는 사람이였으니까요.
그리고 그러한 '어둠'에 지지않는, 부끄러움 없는 빛이 이 작품에는 있습니다.
어째 작품 외적인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만, 작품의 성격을 설명하는데 필요한 이야기이기도 하였으니 용서 바랍니다. 이제부터는 작품 내 내용과 캐릭터에 대해 좀 떠들어 볼게요. 미리니름이 많을 것 같으니 좀 가리겠습니다. 보시려면 드래그 하시면 됩니다만, 안 보신 분들은 제발 다 보고나서...;;
일단 서술방식 뿐만이 아니라 이야기 자체도 굉장히 취향 이였습니다. "궁극의
플라토닉 러브. 사랑이 인류를 구한다!"라고 할까요.
절애(切愛)라니 왜이리. 복고풍이니. 왜이리. 좋아 죽....겠니 ;ㅂ;ㅂ;ㅂ;ㅂ;
그야말로 꾸밈없는 스트레이트. 보디 블로를 정통으로 맞은 듯한 묵직함이였습니다.
약간 장난같이 말했기에 진부해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장난 아닌걸요!! 마지막 클라이맥스 부분의 겹치어 지는 두 사람의 싸움에서는 정말 혼이 울렸습니다. 마지막에 두 사람이 보았던 기적과 같은 노을. 언제나 재로 뒤덮여 있던 도시에 태풍이 내린 축복. 너무 아름다운 장면이라 눈물이 다 나오더라고요ㅠㅠㅠㅠ. 인간성을 거세당했 소년이 연심 하나로 인간성을 되찾고 공주님의 이름을 부르짖는 장면은 너무 애틋했고요, 고양이색 공주님의 "그 사람이 사랑한 건, 분명히 그런 제가 아니니까요"라는 대사....아 진짜 너무...멋지고..ㅠㅠㅠㅠ 여장부 만만세 ㅠㅠㅠㅠ 성녀캐릭터 싫어하는데 이 공주님은 인간적으로도 너무나 납득이 가고 사랑스러워서, 정말......질수밖에 없네요.
그래서 두 사람의 결말이 객관적으로는 비극이라고 해도, 전혀 우울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 그 둘은 결국 승리했으니까요. 개인적으로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속담의 신봉자이지만 이 두 사람만큼은 예외에요. 두 사람은 죽었기에 사랑할 수 있었고, 사랑받을 수 있었으니까요. 죽음으로서만 맺어질 수 있는 무한히 원을 그리는 사랑. 그렇기에 역설적인 순정.
악역인 시갈은 모든 원흉이기에 대단히 얄미워야 하겠습니다만, 애가 오히려 너무 진상이라 웃겨서 비뚤어진 애정이 다 생기네요(...) 전혀 작품에 어울리지 않는 스타일의 미녀로 착각할만한 외모의 장발 미남! 거기에 준비성 철저하고 머리도 좋은 최강의 적으로 등장하면서도 그에 걸맞지 않게 찌질한 성격이 외려 개성적이라 신선했습니다. 아니 이렇게 대놓고 찌질한 적 진짜 없지 않나요. 삽화가께서 얄미우셨는지 절세미인 설정을 좀 무시해 버리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임팩트가 충분하달까. 너무 지 잘난 맛에 살아서 다른 인간을 너무도 이해 못하는 그 병신 같은 모습이 은근 큐트.
마지막 까지도 너무나 그다운 모습을 보이며 뒈져주시는게 참...꿋꿋하더라고요. 바이바이, 바보군.하뮤츠 누님은 투석기라고 해서 공성병기를 생각했었는데 스, 슬링? 완전 비겁 전투법 너무 좋네요. 완전 정보로 제압하는 현대전 스타일이랄까(...) 빙빙 돌리는 궤도 속에 탄환이 장전되면서 팡 하니 쏘는걸 머릿속으로 상상하니 참...신나네요. 비겁하기 짝이 없는 전투법이 안전제일주의인 제 성격에 너무나도 찰떡궁합. 주근깨투성이에 30대를 넘은 비상식적인 설정에, 넘치는 지성, 그에 반하는 압도적인 폭력성. 박치기로 고문신은 그런 특징을 확실히 각인시키는 좋은 신이였습니다. 좋은 누님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줄때 사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생각하니 소름이 돋더라구요(...)
고양이색공주님은 진짜 너무 고결하시고요...ㅠㅠ 성녀계는 전파계 교주가 돼서 납득이 안 될 경우가 많은데(리리나, 락순이 등등) 시론씨는 전혀 다르네요. 예지력을 이용한 시공을 뛰어넘는 교감은 타임 패러독스물 특유의 트리키한 맛이 나서 좋았습니다. 너무 과거의 인물이 좌지우지 한다고 껄끄러워 한 분도 계셨는데, 워낙 짱 좋은 캐릭터다보니 그 정도의 비중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공주님 존명 ㅠㅠ
쿨리오를 포함한 인간폭탄 3인조는 설정대로 안타깝기 짝이 없더군요. 특히 렐리아는 뭐랄까...뒤치다꺼리 해주는 사람 좋은 형님 스타일이라서 취급이 뭐랄까...너무 안타까워서 ㅠㅠㅠㅠ
어지간한 소설에서는 그렇게 보낼 캐릭터가 아니잖아!! 마지막까지 살아남아서 시갈을 엿 먹여 주기를 바랐는데, 그렇게 가버리니 좀 슬펐습니다. 본인은 후회 없겠지만, 결과도 별로 였으니 결과적으로는...OTL어쨌든 좋은 소설입니다. 읽으세요. 우울한 게 싫은 사람도 일단 읽어. 취향을 무시하고서라도 일단 추천할 정도로 좋은 소설이라능. 무엇보다도 이 정도로 마음을 울리는 진중함은 정말 오랫만이였습니다.
PS1 - 이 작품은 사서가 제목에 들어가고, 배경도 도서관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입니다만, 현실과 같은 도서관이라든지 ROD를 생각하시면 패배. 이 세계관의 책이란 고인의 기억 그 자체입니다. 죽은 사람의 기억은 책이 되어 광물과 같이 땅에 묻히거든요. 그러한 기억을 캐내는 것이 배경이 되는 광산촌이고, 그 캐내어진 과거를 보관하는 것이 과거의 신이 관장으로 있는 신립 도서관입니다. 책은 다른 사람이 읽을 수가 있기에, 이를 통한 의지의 전승이 이 작품의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죠.
PS2 - 폭풍과 같은 클라이맥스 신에서 치명적 오타 작렬. 갑자기 웬 멜티 블러드. 시온이 왜나와 ;ㅂ;
PS3 - 김용빈씨 이분 쿠레나이 때의 무협지 발언도 핵심을 꿰뚫더니, 이번 후기도 맘에 드네요. 저도 역시 눈 큰 미소녀들이 돌아 다니는 이야기 보다는 이런 쪽의 이야기가 자주 나와 주고 또 다른 사람들이 많이 찾는 쪽이 기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